쇼무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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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쇼무 천황은 일본의 제45대 천황으로, 724년부터 749년까지 재위했다. 몬무 천황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병약함과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24세에 겐쇼 천황으로부터 양위받아 즉위했다. 재위 기간 동안 불교를 숭상하여 전국에 국분사 건립을 명하고, 동대사 대불을 조성했다. 749년에는 딸 고켄 천황에게 양위하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후지와라노 히로쓰구의 난을 겪었으며, 756년에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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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1년 출생 - 이백
이백은 당나라 시인으로, 방랑 생활을 하다가 현종의 부름을 받아 관직에 올랐으나 사직하고, 두보와 교류하며 여행하다가 반란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며, 스케일이 크고 자유로운 시풍으로 중국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쇼무 천황 - 고쿠분지
고쿠분지는 8세기 쇼무 천황의 칙령으로 각 구니에 세워진 사찰로, 승려를 위한 고쿠분사와 수녀를 위한 고쿠분니사로 나뉘어 운영되었으며 도다이지와 홋케지가 총본산 역할을 수행했고 현재 일본 각지에 관련 지명과 사적, 사원이 남아 있다. - 쇼무 천황 - 만간지 (가와니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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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무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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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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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오비토 (首) |
별칭 | 사미 쇼만 (沙弥勝満) |
출생일 | 701년 9월 22일 |
사망일 | 756년 6월 4일 |
매장지 | 사호야마 남릉 (佐保山南陵), 나라 |
통치 | |
재위 | 724년 3월 3일 – 749년 8월 19일 |
이전 통치자 | 겐쇼 |
다음 통치자 | 고켄 |
연호 | 진키 (神亀) 덴표 (天平) 덴표칸포 (天平感宝) |
수도 | 헤이조쿄 |
황궁 | 나니와 궁 헤이조 궁 |
존호 및 시호 | |
한풍 시호 | 쇼무 천황 (聖武天皇) 쇼호칸진쇼무 황제 (勝宝感神聖武皇帝) |
화풍 시호 | 아메시루시쿠니오시하라키토요사쿠라히코노 스메라미코토 (天璽国押開豊桜彦天皇)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몬무 천황 |
어머니 | 후지와라노 미야코 |
배우자 | 후지와라노 아스카베히메 |
자녀 | 고켄 천황 모토이 왕자 (基王) 아사카 친왕 (安積親王) 이노에 내친왕 (井上内親王) 후와 내친왕 (不破内親王) |
종교 | |
종교 | 불교 |
기타 | |
왕가 | 일본 황실 |
2. 약력
몬무 천황의 제1황자로 태어났으나, 7살 때 아버지 몬무 천황이 사망하고 어머니 미야코도 병약하여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모자가 재회한 것은 쇼무 천황이 37세 때였다). 할머니 겐메이 천황이 어린 황자를 대신해 잠정적으로 즉위했다. 와도(和銅) 7년(714년)에 원복을 치르고 정식으로 태자가 되었으나, 본인의 병약함과 황족 세력 및 외척 후지와라씨와의 대립으로 즉위가 늦춰졌다. 결국 고모인 겐쇼 천황이 다시 황위를 이었고, 쇼무 천황은 24세가 되어서야 겐쇼 천황에게서 양위받아 즉위할 수 있었다.
치세 초기에는 황족 세력을 대표하는 나가야 왕이 정권을 맡았다. 당시 권력을 키우던 후지와라 씨는 일족인 고묘시(光明子)를 황후로 세우려 했으나, 황족이 아닌 자는 황후가 될 수 없다는 관습 때문에 나가야 왕은 반대했다. 그러나 덴표(天平) 원년(729년) 나가야 왕의 변으로 나가야 왕이 자결하면서[41], 고묘시는 황족이 아닌 여성으로는 최초로 황후가 되었다. 이 사건은 고묘시의 이복 오빠들인 후지와라 4형제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여겨진다.
덴표 9년(737년)에는 천연두가 크게 유행하여 후지와라 4형제를 포함한 많은 고관이 사망하는 재난이 발생했다. 나가야 왕의 동생인 스즈카 왕이 지타이조칸지에 임명되어 정국을 수습했다. 덴표 12년(740년)에는 후지와라 히로쓰구의 난이 일어났고, 난 중에 쇼무 천황은 갑자기 수도 헤이조쿄를 떠나 구니쿄, 나니와쿄, 시가라키궁 등으로 약 5년간 수도를 계속 옮기는 '방황 5년'을 겪었다. 이는 잦은 재해와 정치적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보이나, 결국 헤이조쿄로 돌아왔다.[43]
잇따른 재해와 역병으로 불교에 깊이 귀의하여, 덴표 13년(741년) 고쿠분지 건립 조칙[23], 덴표 15년(743년) 동대사 대불 조립 조칙을 내렸다.[24] 같은 해, 농업 생산력 증대를 위해 새로 개간한 토지의 영구 사유를 인정하는 간덴에이넨시자이호를 제정했으나, 이는 율령제의 근간을 흔드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43] 덴표 16년(744년)에는 아들 아사카 친왕이 급사했다.[43]
덴표쇼호(天平勝宝) 원년(749년) 7월 2일, 딸인 아베 내친왕(고켄 천황)에게 양위하고 남성 천황으로는 처음으로 태상천황이 되었다.[27][44] 이후 출가하여 법명을 '쇼만'(勝満)이라 했다.[44] 덴표쇼호 4년(752년) 동대사 대불의 개안법요를 주관했고, 덴표쇼호 6년(754년)에는 당나라에서 온 승려 간진을 만났다. 같은 해 어머니 미야코와 사별했다.
덴표쇼호 8년(756년)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언으로 덴무 천황의 손자인 도소왕을 황태자로 지명했다. 사후 '쇼호칸진쇼무코테이'(勝宝感神聖武皇帝)라는 시호를 받았고, 후에 쇼무 천황(聖武天皇)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유품 중 일부는 고묘 황후에 의해 동대사에 봉헌되어 쇼소인에 보관되어 있다.
2. 1. 즉위 전
몬무 천황과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딸인 후지와라노 미야코 사이의 제1황자로 태어났다.[6] 그의 이미나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오시히라키 토요사쿠라히코노미코토(Oshi-hiraki Toyosakura-hiko-no-mikoto)[5]로 알려져 있었다.[4]다이호(大宝) 원년(701년)에 태어나, 게이운(慶雲) 4년(707년) 6월 15일(7월 18일), 일곱 살의 나이에 아버지 몬무 천황과 사별했다. 어머니 미야코는 심신이 약해져 오랫동안 아들과 만나지 못했고, 모자가 다시 만난 것은 쇼무 천황이 37세가 되어서였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할머니이자 덴지 천황의 딸인 겐메이 천황이 쇼무가 장성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황위를 계승하여 즉위했다 (게이운 4년 7월 17일, 707년 8월 18일).
와도(和銅) 7년(714년) 6월 25일(8월 9일), 수친왕(首親王)은 원복을 치르고 같은 날 정식으로 태자가 되었다. 그러나 『속일본기』에는 태자의 원복 연월일 기록은 있지만 입태자의 정식 연월일 기록은 없어, 실제 입태자 시기는 겐쇼 천황 즉위 후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한 요로(養老) 4년(720년) 전후라는 설도 있다.[37] 태자 자신의 병약함과 더불어, 황족 세력과 외척인 후지와라씨 사이의 정치적 대립으로 인해 즉위는 계속 미루어졌다. 결국 이듬해인 레이키(霊亀) 원년(715년) 9월 2일(10월 3일), 고모이자 몬무 천황의 누나인 겐쇼 천황이 '대리의 대리'로서 황위를 잇게 되었다. 쇼무는 24세가 되어서야 겐쇼 천황으로부터 양위 받아 즉위할 수 있었다.
당시 덴무 천황과 지토 천황의 직계 혈통이라 할지라도, 황족이 아닌 후지와라씨 출신의 어머니를 둔 황자의 즉위는 이례적인 일로 여겨졌으며, 그의 권력 기반은 불안정했다.[38] 이 때문에 쇼무 천황은 즉위와 동시에 당시 9명의 의정관 전원에게 위계를 높여주거나 봉토를 늘려주는 조치를 취했고,[39] 18일 후에는 무쓰베노오키미(六人部王), 나가타노오키미(長田王), 가쓰라기 왕(葛木王) 등 여러 황족과 오토모노 스쿠나마로, 다지히노 히로나리, 구사카베노 오이 등 신하 44명에게도 추가로 승서(昇叙)를 실시했다. 이는 이후 천황 즉위 시 임시 승서가 관례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덴무 천황의 선례를 따른 것이지만, 덴무 천황의 즉위 자체가 진신의 난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40]
치세 초기에는 황족 세력을 대표하는 나가야 왕이 정권을 주도했다. 당시 권력을 확장하던 후지와라씨는 일족인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딸 고묘코(光明子)를 황후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황후는 천황 사후 임시로 즉위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황족만이 황후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고, 나가야 왕은 이를 근거로 고묘코의 입후(立后)를 반대했다. 하지만 진키(神亀) 6년(729년), 나가야 왕의 변이 일어나 나가야 왕이 자결하면서 반대 세력이 사라졌고, 고묘코는 황족이 아닌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황후가 될 수 있었다.[41] 이 사건은 고묘코의 이복 오빠들인 후지와라 4형제가 나가야 왕을 제거하기 위해 꾸민 정치적 음모로 여겨진다. 결과적으로 쇼무 천황의 후궁에는 고묘 황후를 포함하여 총 5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이들 모두 후지와라노 후히토 또는 아가타노 이누카이노 미치요와 혈연관계가 있는 인물들이었다.
2. 2. 즉위와 통치
쇼무는 아버지 문무 천황이 일찍 사망했을 당시 어린아이였기에, 할머니인 겐메이 천황과 고모인 겐쇼 천황이 먼저 즉위했다.[6] 화동(和銅) 7년(714년) 6월 25일(양력 8월 9일)에 원복(元服, 성인식)을 치르고 같은 날 황태자로 책봉되었다고 전해지나[37], 실제 황태자 책봉 시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37] 병약함과 더불어 황족 세력과 외척 후지와라 씨 간의 대립으로 즉위가 미뤄졌고, 영귀(霊亀) 원년(715년)에는 고모 겐쇼 천황이 즉위했다.[37]요로 8년(724년), 겐쇼 천황이 24세의 조카 쇼무에게 양위하였다(''센소'', senso).[8] 쇼무는 곧바로 즉위식(''소쿠이'', sokui)을 올렸으며[8], 진기 원년(724년) 1월 31일(양력 3월 3일)에 연호를 '진기'로 바꾸었다.[9] 쇼무는 즉위 후 헤이제이궁에 거주했다.[6]
어머니 미야코(宮子)가 후지와라씨 출신으로 황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쇼무 천황의 즉위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졌고 권력 기반은 불안정했다.[38] 이를 극복하기 위해 즉위 직후 당시 9명의 의정관 전원에게 위계 승격 또는 봉토 증가를 시행했고[39], 18일 후에는 여러 왕족과 신하 44명에게 추가로 위계를 높여주었다. 이는 이후 천황 즉위 시 임시 승서(昇叙)가 관례화되는 계기가 되었다.[40]
치세 초기에는 황족 세력을 대표하는 나가야 왕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41] 외척인 후지와라 씨는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딸이자 쇼무의 부인인 고묘코(光明子)를 황후로 세우려 했으나, 황후는 황족 출신이어야 한다는 당시 관습 때문에 나가야 왕은 이에 반대했다.[41] 신키(神亀) 6년(729년), 나가야왕의 변이 일어나 나가야 왕이 자살하자[41], 고묘코는 비황족 출신으로는 최초로 황후(고묘황후)가 되었다.[11][41] 이 사건은 고묘코의 이복 오빠들인 후지와라 사형제가 정적 나가야 왕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꾸민 것으로 여겨진다.[41] 고묘 황후를 위해 황후궁직(皇后宮職, 고고구시키)이라는 관직이 신설되었고, 이는 헤이안 시대까지 이어졌다.[11]
덴표(天平) 9년(737년), 대규모 천연두 유행으로 후지와라 4형제를 비롯한 정부 고관들이 대거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10][41] 정치 공백을 수습하기 위해 나가야 왕의 동생인 스즈카 왕이 지다이조칸지(知太政官事)에 임명되었고[41], 이후에는 고묘황후의 이부형인 다치바나노 모로에가 정권을 주도했다.[33][43]
덴표 12년(740년), 다자이후의 후지와라노 히로쓰구가 중앙 정계의 기비노 마키비, 겐보 등에 대한 불만으로 규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후지와라 히로쓰구의 난).[22] 오노노 아즈마비토가 이끄는 관군에 의해 히로쓰구는 패배하고 처형되었다.[22] 이 난 중에 쇼무 천황은 수도를 헤이조쿄에서 구니쿄로 갑자기 옮겼고[22], 이후 나니와쿄(744년)[22], 시가라키궁(745년)으로 연이어 천도하다가 745년 결국 다시 헤이조쿄로 돌아왔다.[43] 이 약 5년간의 잦은 천도는 '방황 5년(彷徨五年)'이라고 불리며, 잇따른 반란과 재해(덴표 지진 등)[42]로 인한 사회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으나[43], 잦은 천도는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키고 관리와 백성의 반발을 샀다.[43]
잇따른 재해와 역병(천연두)으로 인해 쇼무 천황은 불교에 깊이 귀의했다.[43] 덴표 13년(741년), 전국의 고쿠분지(국분사, 金光明四天王護国之寺)와 고쿠분니지(국분니지, 法華滅罪之寺) 건립을 명하는 조칙을 내렸다.[23] 덴표 15년(743년)에는 나라의 도다이지(동대사)에 거대한 대불(비로자나불)을 건립하라는 조칙을 발표했다.[24]

같은 해(743년), 황무지 개간을 장려하고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간덴에이넨시자이호(墾田永年私財法)를 공포하여 새로 개간한 토지의 영구 사유를 인정했다. 이는 토지 사유화를 촉진하여 율령제의 근간인 공지공민제(公地公民制)를 점차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43]
덴표 16년(744년)에는 유력한 황위 계승 후보였던 아들 아사카 친왕이 각기병으로 급사했다.[43] 일각에서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에 의한 독살설도 제기된다.[43]
덴표 21년(749년) 4월, 쇼무 천황은 황후, 자녀, 고관들과 함께 동대사로 행차하여 대불 앞에서 스스로를 불교의 삼보(三宝), 즉 부처, 가르침, 승려 집단의 종을 자처하며('삼보의 노예', 三宝の奴) 깊은 신앙심을 드러냈다.[25][26] 같은 해 7월 2일, 25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딸인 아베 내친왕(고켄 천황)에게 양위하였다.[27][44] 양위 후 출가하여 '쇼만'(勝満)이라는 법명을 받고 태상천황(太上天皇)이 되었으며, 이는 퇴위한 천황이 불교 승려가 된 첫 사례이다.[27][44] 황후 고묘 역시 비구니가 되었다.[27]
덴표쇼호(天平勝宝) 4년(752년) 4월 9일, 도다이지 대불의 개안공양 법회가 로벤의 주관 하에 성대하게 거행되었다.[28] 덴표쇼호 6년(754년)에는 당나라에서 온 고승 간진이 일본에 도착하여 천황 부부를 만났다.
- 주요 공경(公卿): 쇼무 천황 재위 기간 동안 태정관의 최고위직을 역임한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관직 | 이름 | 재임 기간 | 비고 |
---|---|---|---|
다이조다이진 | 도네리 친왕 | 720년 ~ 735년 | 덴무 천황 아들[7] |
다이조다이진 | 스즈카 왕 | 737년 ~ 745년 | 다케치 친왕 아들[33] |
사다이진 | 나가야 왕 | 724년 ~ 729년 | 다케치 친왕 아들[33] |
사다이진 | 다치바나노 모로에 | 743년 ~ 756년 | 고묘황후 이부형[33] |
우다이진 | 후지와라노 무치마로 | 734년 ~ 737년 | 후지와라노 후히토 아들[33] |
나이다이진 | 후지와라노 도요나리 | ? | 후지와라노 무치마로 아들[33] |
다이나곤 | 후지와라노 후사사키 | ? | 후지와라노 후히토 아들[7] |
- 연호: 쇼무 천황의 통치 기간에 사용된 연호는 다음과 같다.[34]
- 진기 (神亀, 724년 ~ 729년)
- 덴표 (天平, 729년 ~ 749년)
- 덴표칸포 (天平感宝, 749년)
- 덴표쇼호 (天平勝宝, 749년 ~ 757년)
2. 3. 후지와라노 히로쓰구의 난
당시 조정의 실력자였던 후지와라 4형제가 천연두로 잇달아 사망하면서[10] 정국의 주도권은 다치바나노 모로에에게 넘어갔다. 모로에는 쇼무 천황의 어머니 후지와라노 미야코 및 고묘 황후와는 이부/이복 남매 관계에 해당한다. 모로에는 견당사로 당나라에서 돌아온 기비노 마키비와 승려 겐보를 중용했고, 이에 따라 후지와라 씨족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22] 천연두로 사망한 후지와라 4형제 중 한 명인 후지와라노 우마카이의 맏아들 후지와라노 히로쓰구는 738년(덴표 10년) 야마토노카미(大養德守)에서 규슈의 다자이노쇼니(大宰少弐)로 옮겨졌다. 히로쓰구는 이를 좌천으로 받아들여 현 정권에 강한 불만을 품게 되었다.[22]
740년(덴표 12년) 8월 29일, 히로쓰구는 정치를 비판하고 기비노 마키비와 겐보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표문을 조정에 보냈다.[22] 9월 3일, 히로쓰구가 거병했다는 소식이 헤이조쿄에 전해지자, 쇼무 천황은 오노노 아즈마히토를 대장군으로, 기노 이이마로를 부장군으로 임명하여 토벌군을 파견했다. 도카이도, 도산도, 산인도, 산요도, 난카이도 5개 도(道)에서 17,000명의 군사가 동원되었다.[22] 조정에 출사하던 하야토 24명도 종군 명령을 받았고, 사에키노 쓰네히토와 아베노 무시마로가 칙사로 임명되어 전승 기원을 위해 이세 신궁에 폐백을 봉납했다. 또한 여러 지방에 관음보살상 제작과 관음경 사경을 명하여 승리를 기원했다.
9월 21일, 나가토국에 도착한 오노노 아즈마히토는 현지에 정박 중이던 신라 배의 인력과 장비를 활용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다. 9월 22일, 칙사 사에키노 쓰네히토와 아베노 무시마로는 하야토 24명과 군사 4천 명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판궤진(板櫃鎭, 현재 기타큐슈시 부근)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등미(登美)·판궤(板櫃)·경도(京都) 3개 진의 군사 1,767명과 많은 병기를 노획했다. 히로쓰구는 본군 5천 명을 이끌고 구라테 방면으로, 동생 쓰나테(綱手)는 5천 명을 이끌고 분고 방면으로, 다고고마로(多胡古麻呂)는 전하도 방면으로 진군하여 세 방향에서 관군을 포위하려 했다.
그러나 9월 25일, 부젠국의 여러 군지(郡司)들이 관군에 투항하기 시작했다. 9월 29일, 조정은 히로쓰구를 '흉악한 역적'으로 규정하고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귀순을 촉구하며, 히로쓰구를 죽이는 자에게는 5위 이상의 관위를 내리겠다는 조칙을 규슈 전역에 내렸다.[22]
10월 9일, 히로쓰구 군 1만 명과 관군 6천여 명이 판궤하(板櫃河, 현재 기타큐슈시 내)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히로쓰구 군이 하야토를 선봉으로 내세워 강을 건너려 하자 관군은 쇠뇌를 쏘며 저지하고, 동시에 관군 측 하야토를 시켜 히로쓰구 측 하야토에게 투항을 권유했다. 이에 히로쓰구 측 하야토들은 활쏘기를 멈추었다. 칙사들이 히로쓰구를 불러 대화를 시도했으나, 히로쓰구는 자신의 거병이 조정을 어지럽히는 기비노 마키비와 겐보를 처벌하기 위함일 뿐 조정에 반항하려는 의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칙사들이 병력 동원 이유를 묻자 대답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모습을 지켜본 히로쓰구 측 하야토 일부가 관군에 투항했고, 이들은 히로쓰구의 3면 포위 작전과 다른 두 부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음을 관군에게 알렸다.
결국 판궤하 전투에서 패배한 히로쓰구는 배를 타고 히젠국 마쓰우라 군의 지가 섬(고토 열도)으로 달아나 신라로 망명하려 했다. 하지만 탐라(현재 제주도) 근처에서 역풍을 만나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지가 섬으로 되돌아왔다. 히로쓰구는 섬에 숨었으나 10월 23일 아베노 구로마로에게 체포되었고, 11월 1일 오노노 아즈마히토에 의해 히젠의 가라쓰(唐津)에서 동생 쓰나테와 함께 처형되었다.[49][22]
741년(덴표 13년) 1월, 난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이 내려졌다. 사형 16명, 관직 몰수 5명, 유배 47명, 강제 이주 32명, 장형(杖刑) 177명에 달했다. 히로쓰구의 다른 형제들도 대부분 연좌되어 유배되었고, 이로 인해 후지와라 남가(南家), 북가(北家) 등에 비해 히로쓰구가 속한 후지와라 식가(式家)는 한동안 정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난의 진압 소식이 수도에 채 도착하기도 전인 740년 10월, 쇼무 천황은 돌연 헤이조쿄를 떠나 동쪽으로 향했다.[12][13] 이는 수도에 남아있을지 모를 후지와라 지지 세력에 대한 두려움과[14][15][16][17], 지방의 잠재적 반란을 억제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14][15][16][17] 천황 일행은 이가국, 이세국, 미노국, 오미국 등지를 거쳐[18] 741년 1월 6일 야마시로국의 구니쿄(恭仁京, 현재 기즈가와시)에 도착하여 이곳을 새로운 수도로 선포했다.[15][20][21] 구니쿄는 방어에 유리하고 우대신 다치바나노 모로에의 기반 지역이었던 반면, 헤이조쿄는 후지와라 씨의 본거지였다.[19] 이후에도 쇼무 천황은 744년 나니와쿄(難波京)로,[22] 745년에는 시가라키쿄로 잠시 수도를 옮겼다가 다시 헤이조쿄로 돌아오는 등[22] 불안정한 천도를 반복했는데, 이는 먼 규슈에서 일어난 히로쓰구의 난이 천황에게 얼마나 큰 충격과 불안감을 주었는지를 보여준다.
3. 불교 진흥
쇼무 천황의 치세인 덴표 시대는 천연두를 비롯한 역병과 각종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던 시기였다.[10] 이러한 사회 불안 속에서 쇼무 천황은 불교에 깊이 귀의하여 국가의 안녕과 민심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다.
740년 후지와라노 히로츠구의 난 이후 계속된 정세 불안과 재난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741년(덴표 13년)에는 전국의 각 구니(國)마다 고쿠분지(國分寺, 정식 명칭: 金光明四天王護国之寺)와 고쿠분니지(國分尼寺, 정식 명칭: 法華滅罪之寺)를 건립하라는 조서를 내렸다.[23] 이는 불교의 힘을 빌려 국가를 보호하려는 진호국가(鎭護國家) 사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743년(덴표 15년)에는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에 거대한 비로자나불(대불)을 조성하라는 조서를 발표했다.[24] 이는 가와치의 지식사(知識寺) 방문과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 활동하던 승려 행기(行基)와의 만남 등을 통해 불교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킨 결과였다. 천황은 대불 조성을 통해 모든 백성이 부처의 가르침 아래 하나가 되기를 염원했다. 이 대불은 752년(덴표쇼호 4년) 성대한 개안법요(開眼法要)를 통해 완성되었으며,[28] 쇼무 천황 자신도 이 행사에 참석했다.
쇼무 천황은 개인적인 신앙심도 깊었다. 749년(덴표 21년)에는 도다이지 대불 앞에서 스스로를 불교의 삼보(三寶)의 종(奴)이라 선언하며,[25][26] 딸인 아베 내친왕(고켄 천황)에게 양위하고 출가하였다.[27] 이는 남성 천황으로서는 처음으로 태상천황이 된 사례이자, 퇴위한 천황이 불교 승려가 된 최초의 경우였다.[27] 출가 후 법명은 승만(勝満)이라 하였다.
754년(덴표쇼호 6년)에는 여러 차례의 도항 시도 끝에 일본에 도착한 당나라의 고승 간진(鑑眞)을 고묘 황후, 고켄 천황과 함께 맞이하여 계율을 받는 등[46] 불교 진흥에 힘썼다.
쇼무 천황의 불교 진흥 정책은 후지와라 후히토 이래의 국가 중심적 불교관에서 나아가, 행기와 같은 민중 교화에 힘쓰는 승려들의 활동에도 주목하고 이를 국가 정책에 반영하려 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묘 황후와의 불교관 차이 등 내부적인 갈등 요인도 안고 있었다.[46] 이러한 쇼무 천황의 불교 정책은 이후 일본 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1. 평가
쇼무 천황의 치세인 덴표 시대는 각종 자연재해와 천연두와 같은 역병이 만연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천황은 불교에 깊이 귀의하여 국가적인 불교 진흥책을 펼쳤다. 741년에는 각 지방에 고쿠분지를 건립하라는 조서를 내렸고,[23] 743년에는 나라에 도다이지를 세우고 그 중심에 거대한 비로자나불(대불)을 만들라는 명을 내렸다.[24] 이는 일본 불교 미술의 정수로 평가받지만, 높이 16m에 달하는 대불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청동과 금 보유량이 바닥날 정도로 막대한 재정이 소모되었다는 비판도 받는다.[6] 752년에는 쇼무 천황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대불 개안식이 열렸다.[28]경제적으로는 743년에 간전영년사재법을 제정하여 황무지 개간을 장려했다. 이 법은 새로 개간한 토지에 대해 영구적인 사유를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는 토지 국유를 원칙으로 하는 공지공민제의 근간을 흔들고 율령제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치적으로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740년 후지와라노 히로츠구의 난이 발생하자 이를 진압한 뒤 수도를 구니쿄로 옮겼고, 이후 744년에는 나니와쿄, 745년에는 시가라키궁으로 천도했다가 다시 헤이조쿄로 환도하는 등[22] 잦은 천도를 단행했다. 또한 744년에는 유력한 황위 계승 후보였던 아사카 친왕이 급사했는데, 이를 두고 후지와라 나카마로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쇼무 천황은 황족이 아닌 신하 가문 출신 여성을 황후로 맞이한 최초의 천황이기도 하다. 후지와라씨 출신인 고묘 황후를 황후로 삼았으며, 황후를 보좌하는 관직인 고고구시키(皇后宮職)를 신설했다.[11] 이는 후지와라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749년 쇼무 천황은 스스로를 불교의 삼보(三寶)의 종(奴)이라 칭하며[25][26] 딸인 아베 내친왕(고켄 천황)에게 양위하고 출가하였다.[27] 이는 남성 천황이 태상천황이 된 최초의 사례이자, 퇴위한 천황이 불교 승려가 된 첫 사례였다.[27] 이후 태상법황(太上法皇)으로서 754년 당나라에서 온 승려 간진을 맞이하는 등 불교 활동을 이어갔다.
756년 5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27] 생전에 아끼던 유품들은 고묘 황후의 뜻에 따라 도다이지에 봉헌되어 쇼소인에 보관되었다. 이 유물들은 덴표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천황의 무덤은 나라시 호렌쵸(法蓮町)에 있는 사호야마노미나미노 미사사기(佐保山南陵)이며,[30] 근처에 고묘 황후의 능묘도 있다.[32]

4. 가족 관계
아버지는 제42대 몬무 천황(文武天皇)이며, 어머니는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의 딸인 후지와라노 미야코(藤原宮子)이다.[6] 쇼무 천황이 7세 때 아버지 몬무 천황이 사망했고, 어머니 미야코는 오랫동안 병을 앓아 쇼무 천황과 만나지 못하다가 쇼무 천황이 37세가 되어서야 만날 수 있었다.
쇼무 천황은 5명의 배우자와 6명의 자녀를 두었다.[7]
구분 | 이름 | 생몰년 | 자녀 | 비고 |
---|---|---|---|---|
황후 | 고묘 황후(光明皇后) 후지와라씨(藤原氏) (藤原 安宿媛|후지와라노 아스카베히메일본어) | 701년 ~ 760년 | 제46·48대 고켄 천황(孝謙天皇) (阿倍内親王|아베 내친왕일본어) 基王|모토이 왕일본어 (727년~728년) |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딸. 황족이 아닌 신하 가문 출신으로 황후가 된 최초의 사례이다.[41] 나가야 왕의 변으로 정적 나가야 왕이 제거된 후 황후로 책봉되었다. |
부인(夫人) | 県犬養広刀自|아가타노이누카이 히로토지일본어 | ? ~ 762년 | 이노에 내친왕(井上内親王, 717년?~775년) 不破内親王|후와 내친왕일본어 (723년?~795년?) 安積親王|아사카 친왕일본어 (728년~744년) | 県犬養唐|아가타노이누카이노 모로코시일본어의 딸. |
부인(夫人) | 후지와라씨(藤原氏) (南殿|남전일본어) | ? ~ 748년 | (자녀 없음) | 후지와라노 무치마로(藤原武智麻呂)의 딸. |
부인(夫人) | 후지와라씨(藤原氏) (北殿|북전일본어) | ? ~ 760년 | (자녀 없음) | 후지와라노 후사사키(藤原 房前)의 딸. |
부인(夫人) | 橘古那可智|타치바나노 코나카치일본어 (橘広岡古那可智|타치바나노 히로오카노 코나카치일본어) | ? ~ 759년 | (자녀 없음) | 橘佐為|타치바나노 사이일본어의 딸. |
5. 기타
정창원(正倉院)은 일본 나라에 있는 동대사의 보물 창고이다. 701년부터 756년까지 재위한 쇼무 천황과 701년부터 760년까지 재위한 고묘황후와 관련된 약 9,000점의 유물과 일본 역사상의 덴표 시대 예술 공예품을 소장하고 있다. 정창원의 중요성은 일본과 대륙(중국)에서 온 당나라 시대 문화 유물의 보고라는 점에 있다. 가구, 놀이 도구, 악기, 의복/장신구, 무기, 불교 관련 유물, 서적 등이 포함된다.
공경(公卿) (公卿|구교일본어)은 메이지 시대 이전 일본 궁정에 소속된 소수의 최고 권력자들을 일컫는 총칭이다.[33] 일반적으로 이 엘리트 집단은 한때 3~4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세습 관료로서, 오랜 경험과 배경을 통해 인생의 정점에 도달한 인물들이었다.[33] 쇼무 천황 재위 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다이죠칸의 정점에 있었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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